생각 2013.11.11 일상의 시선

영생과 죽음, 영성에 대한 묵상 (2013.11.11)

간혹 익숙한 이미지와 개념이 전혀 남다르고 낯설게 다가오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오늘이 그랬다. 혼자서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문득 죽음이라는 장면을 떠올렸다.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는 순간이라고 느끼자, 맘속 깊숙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외롭고 슬픈 고독과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마치 단 한번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다가 죽음 앞에 갑자기 서게 된 사람처럼.

이처럼 죽음을 대면한 것은 소스라치게 무섭고 고독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진실되게 절실하게 죽음을 대면하게 되자 삶을 깨닫게 되는 인생의 알짬과도 같은 지혜와 태도를 얻을 수 있었다.

죽음은 인간의 부족함, 흙스러움, 취약함의 극대치이다. 삶의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도 죽음이라는 현실보다는 낫다. 게다가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필연이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이처럼 죽음을 대면하게 될 때, 그 흙스러움과 지독한 취약함, 절대 고독의 느낌은 우리를 광야에 선 예수 옆에 서게 한다. 예수가 광야에서 40일간 묵행하는 동안 시험받은 사건은 시도 때도 없이 우리 맘 속에 일어나는 취약함의 도전이다.

예수처럼 우리는 그 광야에서 배고픔(또는 병듦)이라는 생존의 문제에서 오는 취약함과 씨름한다. 취업난에, 실직에, 직장에서도 실직에 대한 위협과 두려움 속에서 우리는 늘 안전판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때로는 허덕이기도 하고 때로는 악바리처럼 그 안에 노예가 되기도 한다. 예수처럼 우리는 그 광야에서 인정받지 못함과 배제당함이라는 자존의 문제에서 오는 취약함, 가질 수 없음과 공허함이라는 소유의 문제에서 오는 취약함과도 씨름한다.

광야라는 영성의 공간을 마련하고 그 속에서 절실하게 죽음이라는 취약함의 극한을 대면함으로써, 살면서 겪게 되는 위와 같은 취약함들을 상대화해내는 사람에게 복 있을진저. 이러한 사람은 매사에 우러나오는 자발성으로, 감사해하는 마음으로, 일희일비하지 않는 마음으로, 조급해하지 않는 담담함으로 현실의 어려운 문제 앞에, 취약한 상황 앞에 설 수 있는 성숙한 삶의 자세를 얻게 된다.

죽음 근처까지 가본 사람이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는 고백을 숱하게 본다. 사고 또는 질병을 통해 삶의 절실함(의지)과 죽음의 필연 사이에서 씨름해본 사람은 남은 생을 더욱 의미있게 살고자 다짐하게 된다. 굳이 사고와 질병이 아니라도 죽음을 대면하는 일은 가능하다. 묵상이나 성찰을 통해서 가능하다. 때론 나도 모르게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오늘처럼.

죽음을 대면함으로써 이 순간의 현재를 참되게, 영원이라는 우주에서 온 것처럼 나만의 부르심으로 사는 일, 그것이 바로 영생 아닐까. 영성은 이처럼 묵상, 성찰 또는 실천 등을 통해 죽음을 대면함으로써 영생의 삶을 현재 가운데 살아가게 해준다.

이것이 오늘 내가 발견한 영생과 죽음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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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아직도 가야할 길'에 나오는 포기와 부활이라는 단락이다. 영생과 죽음이라는 이 글과 맥이 깊이 닿아 있어 재인용해본다.


1-14. 포기와 부활

ㅇ 인간이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결국 인간 자신을 포기하고 생명도 포기해야 한다. 이는 하느님이나 운명의 신이 강요하는 가혹한 운명을 말하는 것으로 이로 인해 우리의 존재는 하잘것없는 것이 된다. 서양에서는 이러한 운명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ㅇ 그러나,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인간 존재는 가장 황홀하고 영구적이고 확고하며 끝없는 인생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죽음이 바로 모든 생의 의미와 더불어 생명을 제공하는데, 이것이 종교의 중심적 지혜다.

ㅇ 포기는 '괄호로 묶기'라는 균형잡기 훈련으로 보다 잘 설명될 수 있다. '괄호로 묶기'란 근본적으로 개인이 안정감을 느끼는 욕구와 자기 주장을 하고자 하는 욕구를 잠깐 포기하는 대신, 새로운 자료와 상황에 적응하여 새로운 성장을 이룸으로써 균형을 이루게 하는 행동을 말한다. 다시 말해 자신을 한쪽에 제쳐 놓음으로써 새로운 재료가 자신 안으로 혼합해 들어올 여지를 만드는 것이다.

포기의 고통이란 죽음의 고통이고 옛것의 죽음이란 새것의 탄생이다. 죽음의 고통이란 생산의 고통이고, 생산의 고통은 죽음의 고통이다. 우리가 새롭고 더 좋은 생각과 개념, 이론, 이해를발육시킨다는 것은 옛 생각과 개념, 이론, 이해 등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ㅇ 신학자 샘 킨은 <춤추는 신>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숙한 깨달음이란 지난 세월 내가 갖게 된 선입견과 편견을 이해하고 개선할 때만 가능해진다. 나에게 내재한 존재를 깨닫기 위해서는 두 가지에 모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즉, 익숙한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낯선 것에 대해서는 환영하는 것이다. 매번 어떠한 물건이나 사람, 사건을 접할 때, 우리는 나의 현재 욕구와 과거 경험 또는 미래에 대한 기대를 기초로 내가 본 것을 이해하고 결정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을 괄호로 묶어놓고, 개선하고 침묵케 하는 훈련이 없이는 현재의 순간은 과거에 이미 보았거나 경험한 어떤 것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순수하게 새로운, 사물이나 사람들이나 사건들의 실재가 내 안에 뿌리박게 하기 위해, 자아의 탈중심화를 겪어야 한다"

ㅇ 현재의 삶이라는 것은 삶과 죽음이 서로 꼬리를 맞물고 일어나며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현상이다. 세네카는 이천년전 "평생 동안 우리는 사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고 말했지만, 에리히프롬은 "더욱이 흥미를 돋우어 주는 것은, 생을 통해 인간은 죽기를 배워야만 한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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