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노트] 그리스인 조르바 (3/3) 독서 노트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31.

내가 뭘 먹고 싶고 갖고 싶으면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목구멍이 미어지도록 처넣어 다시는 그놈의 생각이 안나도록 해버려요. 그러면 말만 들어도 구역질이 나는겁니다. 이 이야기만 설명이 되겠군. 어렸을 때 나는 버찌에 미쳐 있었어요. 하지만 돈이 있어야지요... 밤이고 낮이고 나는 버찌 생각만 했지요. 입에 군침이 도는 게, 아, 미치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화가 났습니다. 창피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나는 버찌가 날 데리고 논다는 생각이 들어 속이 상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한 줄 아시오?...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시장으로 달려가 버찌 한 소쿠리를 샀지요. 도랑에 숨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넘어올 때까지 처넣었어요. 배가 아파 오고, 구역질이 났어요. 그렇습니다. 두목, 나는 몽땅 토했어요.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버찌를 먹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보기만 해도 견딜 수 없었어요.나는 구원을 받은 겁니다. 언제 어디서 버찌를 보건 내겐 할 말이 있습니다. 이제 너하고는 볼일이 없구나 하고요. 훗날 담배나 술을 놓고도 이런 짓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마시고 피우지만 끊고 싶으면 언제든지 끊어 버립니다. 나는 내 정열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고향도 마찬가지에요. 한때 몹시 그리워하던 적이 있어서 그것도 목젖까지 퍼 넣고 토해 버렸지요.

32.
"... 만사는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그가 조금 뜸을 들이고는 말을 계속했다. "... 믿음이 있습니까? 그럼 낡은 문설주에서 떼어 낸 나뭇조각도 성물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나요? 그럼 거룩한 십자가도 그런 사람에겐 문설주나 다름이 없습니다."
나는 뇌의 기능이 더할 나위 없이 거칠고 대담한, 정신은 누군가가 건드릴 때마다 불이 되어 타오르는 이 사나이에게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33.
"그래요. 당신은 나를 그 잘난 머리로 이해하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팔과 가슴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침묵한다 이겁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아요. 흡사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이겁니다. 그래,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로? 웃기지 맙시다."

34.
"... 내게는, 저건 터키 놈, 저건 불가리아 놈, 이건 그리스놈,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두목, 나는 당신이 들으면 머리카락이 쭈뼛할 짓도 조국을 위해서랍시고 태연하게 했습니다. 나는 사람의 멱도 따고 마을에 불도 지르고 강도 짓도 하고 강간도 하고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했습니다. 왜요? 불가리아 놈, 아니며 터키 놈이기 때문이지요.

... 요새 와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놈, 이런 식입니다. 그리스인이든,불갈아인이든 터키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요새 내게 문제가 되는 건 이것뿐입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모두가 한가집니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이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 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35.
"...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쓰여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그 모든 걸 졸업했습니다. 내게는 끝났어요.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조르바라는 사내가 부러웠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다. 내가 고독 속에서 의자에 눌어붙어 풀어 보려고 하던 문제를 이 사나이는 칼 한 자루로 산속의 맑은 대기를 마시며 풀어 버린 것이었다.
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날 밤 처음 들은 꾀꼬리 우는 소리는 우리 고독을 더할 나위 없는 슬픔으로 채웠다. 나는 문득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흠칫했다.

36.
"일을 어정쩡하게 하면 끝장나는 겁니다. 말도 어정쩡하게 하고 선행도 어정쩡하게 하는 것, 세상이 이 모양 이꼴이 된 건 다 그 어정쩡한 것 때문입니다.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 못 하나 박을 때마다 우리는 승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악마 대장보다 번거충이 악마를 더 미워하십니다."

37.
내 딴에는 자기 위안의 한 경지에 도달했답식 한번 과부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조르바는 그 긴 팔을 쑥 내밀어 손바닥으로 내 입을 막아 버렸다. "닥쳐요!" 그가 구겨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닥쳤다. 부끄러웠다. <진짜 사내란 이런 거야...> 나는 조르바의 슬픔을 부러워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그는 피가 덥고 뼈가 단단한 사나이... 슬플 때는 진짜 눈물이 뺨을 흐르게 했다. 기쁠 때면 형이상학의 채로 거르느라고 그 기쁨을 잡치는 법이 없었다.

38.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하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 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39.
"조르바, 내 말이 틀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소위, 살고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돈 벌고 명성을 얻는 걸 자기 생의 목표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또 한 부류는 자기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인류의 삶이라는 것에 관심이 있어서 그걸 목표로 삼는 사람드이지요. 이 사람들은 인간은 결국 하나라고 생각하고 인간을 가르치려 하고, 사랑과 선행을 독려하지요.

마지막 부류는 전 우주의 삶을 목표로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인 짐승이나 나무나 별이나 모두 한 목숨인데, 단지 아주 지독한 싸움에 휘말려 들었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요. 글쎄 무슨 싸움일까요?...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싸움이지요."

40.
(케이블 목재 고가선 개통식 대실패 이후)
우리는 술잔을 부딪고 토끼 피처럼 붉은 크레타 포도주를 마셨다. 그 포두주를 마시면 대지의 피와 말을 터 도깨비가 되는 기분이었다. 혈관에는 힘이 넘쳐흐르고 가슴은 선한 마음으로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양이었던 사람은 사자가 되었다. 인생의 슬픔은 잊히고 고삐는 사라졌다.짐승이고 하느님이고 인간과 화합하여 우주의 일부분이 되는 기분이었다.

"조르바! 이리 와보세요! 춤 좀 가르쳐 주세요!" 
조르바가 펄쩍 뛰어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다.
"춤이라고요, 두목? 정말 춤이라고 했소? 야호! 이리 오쇼!"
"조르바, 갑시다. 내 인생은 바뀌었어요. 자 놉시다!"

조르바의 춤을 바라보며 나는 처음으로 무게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처절한 노력을 이해했다. 나는 조르바의 인내와 그 날램, 긍지에 찬 모습에 감탄했다. 그의 기민하고 맹렬한 스텝은 모래 위에다 인간의 신들린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다.

41.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 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적(혹자는 하느님이라 부르고 혹자는 악마라고 부르는)이 우리를 쳐부수려고 달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부서지지 않았다.
외부적으로는 참패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는 법이다. 외부적인 파멸은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42.
"어느 날 밤, 눈으로 덮인 마케도니아 산에는 굉장한 광풍이 일었지요. 내가 자고 있는 오두막을 뒤흔들며 뒤집어엎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진작 이걸 비끄러매고 필요한 곳은 보강해두었지요. 나는 불가에 홀로 앉아 웃으면서 바람의 약을 올렸어요. <이것 보게, 아무리 그래 봐야 우리 오두막에는 들어올 수 없어. 내가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니까. 내 불을 끌 수도 없겠어. 내 오두막을 엎어? 그렇게는 안 되네.>"

조르바의 이 몇 마디 안되는 말에서 나는 인간이 취해야 할 도리와 강력하면서도 맹목적인 필연에 부딪혔을 때 우리가 맞서 대적할 어조를 감득했다.

43.
재수 없는 사람은 자기의 초라한 존재 밖에도 스스로 자만하는 장벽을 쌓는 법이다. 이런 자는 거기에 안주하며 자기 삶의 하찮은 질서와 안녕을 그 속에서 구가하려 하는 게 보통이다. 하찮은 행복이다.
만사는 정해진 순서를 따라 진행된다. 험한 길, 신성한 길을 따르다 안전하고 단순한 법칙에 따르기도 한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로부터의 공격이 차단된 하찮은 확신의 테두리 안에서 지네처럼 꼼지락거리다 보면 아무 도전도 받을 수 없다. 숙명적인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강력한 적은 오직 하나, 터무니없는 확신 뿐이다.확신은 내 경험의 벽을 허물고 내 영혼을 덮치려 하고 있었다.

44.
(이제 주인공인 내가 조르바와 이별을 나누며)
"나, 당신과 함께 있을 수도 있어요..." 나는 조르바의 필사적인 애정에 당황하고 말았다.
"... 당신과 함께 갈 수도 있어요. 나는 자유로우니까."
조르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를 거요." 내가 오기를 부렸다. 조르바의 말이 정통으로 내 상처를 건드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모든 걸 도박에다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좋은 머리가 있으니까 잘은 해나가겠지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아니야! 더 붙잡아 맬 뿐이지... 이 잡것이! 
줄을 놓쳐 버리면 머리라는 이 병신은 그만 허둥지둥합니다. 그러면 끝나는 거지. 그러나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맛이 뭐 나겠어요? 노란 카밀레 맛이지. 멀건 카밀레 차 말이오. 럼주 같은 맛이 아니오.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조르바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초인에 관한 야망과 충동에 사로잡혀 이 세상일에 만족하지 못했다.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조용해졌다. 나는 한계를 정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가르고 내 연을 놓치지 않도록 꼭 붙잡았다.

45.
(조르바가 부친의 이야기를 하며)
"... 악덕이란 악덕은 두루 갖춘 이 양반도 자를 때는 칼로 베듯이 잘라 버립니다. 한 가지 예를 들지요. 이 양반은 담배를 굴뚝같이 피워 댔습니다. 어느 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 밭을 갈러 들로 나갔어요. 나가서 밭둑에 기대고 일 시작하기 전에 한 대 피울 요량으로 담배를 찾는답시고 쌈지를 찾으로 혁대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는데, 어렵쇼, 쌈지를 꺼내고 보니 비어 있더란 말입니다. 집에서 나오면서 담배 집어넣는 걸 깜빡 잊어버린 거지요.
이 양반은 불같이 화를 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마을로 내달았지요. 아시겠지만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이성이고 나발이고 없었던 거지. 그런데 갑자기(이래서 나는 늘 사람이란 참 묘한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양반은 걸음을 멈추었대요. 부끄러워진 거예요. 쌈지를 꺼내어 이로 갈가리 물어 찢고 땅바닥에 팽개친 다음 침을 팍 뱉었다나.
<더럽다, 더러워! 이 더러운 놈의 화냥것!> 이랬답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는 담배를 입술에 대지 않았어요.

두목, 진짜 사내란 건 이런 게 아닐까요, 잘 자시오!"

46.
(조르바의 죽음이 담긴 편지)
... 유언이 끝나자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시트를 걷어붙이며 일어서려고 했습니다. 우리가(부인인 류바, 저, 이웃의 장정 몇 사람이) 달려가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모두를 한쪽으로 밀어붙이고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창문가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창틀을 거머쥐고 먼 산을 바라보다 눈을 크게 뜨고 웃다가 말처럼 울었습니다. 이렇게 창틀에 손톱을 박고 서 있을 동안 죽음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미망인 류바는 선생님께 편지를 보내어 자기 대신 경의를 표해 달라고 했습니다. 미망인 말씀에 따르면 고인은 자주 선생님 이야기를 했고 자기의 사후에는 산투르를 선생님께 드리어 정표를 삼겠다는 분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망인께서는 선생님께 이 마을을 지나는 걸음이 있으시면 손님으로 그날 밤을 쉬시고 아침에 떠나실 때는 산투르를 가지고 가시라는 것입니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